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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문화의 신전’ 세종문화회관에 ‘트로트’의 자리는 없었다

 

 

[토요판] 이영미의 광화문시대

 

⑨ ‘대중’에게 개방된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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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은 서울시민회관이 화재로 불탄 자리에 1978년 새로 세워졌다. 유신 정권 말기의 공공건물인 세종문화회관은 돌기둥을 늘어세운 열주(列柱)와 돌계단을 배치해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을 듯한 권위와 엄숙함을 풍기고 있다. 사진은 개관 직전인 1978년 초의 모습. 서울시 제공

 

세종로 한복판에 세종문화회관이란 공연장이 들어섰다. 1978년 4월의 일이다. 1972년 서울시민회관이 예상치 못한 화재로 불탄 자리에 새 공연장을 세운 것이다.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회관’으로 계획되었다가, 1960년 최초의 시민혁명을 거치며 가슴 벅찬 ‘시민’이란 이름을 달았던 공연장은 1972년 10월 유신 발표 뒤에 한달반 만에 사라지고,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세종’문화회관이 건립됐다. 이 시기에 한국 정치도 크게 바뀌었다. 법률과 제도에서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 체계를 지니고 있었던 제3공화국이 끝나고, 민주공화국에서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권은 물론이거니와 삼권분립과 정당정치까지 무시한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고, 각급 학교의 총학생회가 사라지는 대신 학도호국단이 생기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살벌한 이른바 ‘긴조(긴급조치의 준말) 시대’, ‘유신 말기’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던 때였다.

 

민족주의와 전통문화는 폭압적 유신체제를 합리화하는 중요한 방편 중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문화예술 진흥에 대한 정부의 의무를 법제화한 문화예술진흥법과 이를 전담하는 기관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설립이 유신체제 설립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 기조는 ‘한국의 문화 진흥’이라기보다는 ‘민족문화 진흥’이었다. 이 지점에서 민족주의·민족문화란, 충효사상·호국불교의 강조 사례에서 보이듯 정권의 입맛에 맞게 해석되고 요리되었다.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동상의 뒤편에 콘크리트 광화문이 버티고 있고, 그 중간에 세워지는 공연장 이름에 ‘세종’이 붙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권력의 지나친 요구 막은 건축가 엄덕문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직선미를 뽐내던 시민회관과 달리, 건물 양식에서도 ‘한국’, ‘전통’이 강조되었고 함부로 가까이 할 수 없을 듯한 엄숙한 아름다움과 권위적 풍모를 지녔다. 벽면의 비천상 부조(김영중 작)는 박정희가 공을 들였던 신라 유적인 경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비천상을 변형했고, 극장 안팎을 청사초롱 형태로 장식했다. 돌기둥을 늘어세운 열주(列柱)와 돌계단은 궁궐·신전의 권위와 엄숙함을 풍기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에 지어진 공공건축들에 이러한 계단과 열주가 아주 흔했다는 점이다. 장충동 국립극장, 경주박물관 등의 주요 박물관 건물은 물론 실용성이 중요한 연구·교육기관인 정신문화연구원, 심지어 여의도의 <한국방송>(KBS) 건물조차도 어김없이 계단과 열주가 갖추어져 있다.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피디(PD)이며 이 시기 <한국방송> 재조직화의 중심인물이었던 최창봉은 이 시기를 회고하며 ‘방송사가 무슨 신전이냐?’며 기막힌 권위주의를 한탄했다. 애초에는 대형 기자재와 세트가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실용적 청사로 설계해 놓았는데, 자신이 외국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돌기둥과 높은 계단을 만들어 기자재·세트 반입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더라는 것이다.(최창봉 구술, 이영미 채록연구, <최창봉>,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7)

 

그나마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엄덕문의 능력으로 세종문화회관이 이 정도의 모습을 지닌 것은 다행이었다. 정신문화연구원·화랑수련원·광주박물관 등 이 시기에 지어진 공공건물의 상당수가 계단과 열주는 물론 기와지붕과 서까래를 갖춘 한옥 궁궐의 모양을 하고 있고, 거기에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좋아했다는 계란색을 입힌 서울 능동 어린이회관 같은 모습도 많았다. 그에 비하자면 세종문화회관은 안채·별채 등을 분리하는 한옥 건축의 특성을 계승해 좁은 땅 위에 여러 공간을 배치하면서 현대적 감각과 기능성도 잘 살렸다는 평을 받는다. 기와지붕에 서까래도 만들어달라는 정부의 요구를 엄덕문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김유경, ‘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건축가, 엄덕문’, <오마이뉴스> 2009년 3월6일, 안창모, ‘건축’, 한국예술연구소 편, <한국현대예술사대계 IV>, 시공사, 2004, 참조)

 

1978년 유신 말에 세종문화회관 개관

시민회관 때와 달리 대중문화 외면

국제가요제·샹송 가수 공연은 허락

독재 정권의 권위적 예술관 탓

6월항쟁 뒤 ‘트로트 금기’ 풀려

89년 패티김·이미자 등 첫 무대

‘모여드세’ 등 민중예술에도 개방

 

시민 중심 문화공간으로 변신해

 

세종문화회관은 오랫동안 대중음악인들을 받아주지 않는 권위적인 공연장이었다. 앰프 없이 공연할 수 있는 음향 설계와 파이프오르간까지 갖춘 공연장에 마이크·앰프 쓰는 대중음악이 들어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레코드 음악 감상회’가 오랫동안 세종문화회관의 정례화된 프로그램이었음을 생각하면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 게다가 서울국제가요제나 프랑스 샹송 가수의 내한공연에는 문호가 개방되었으니, 핵심은 앰프 여부가 아니라 한국대중예술을 저급한 종류로 보는 예술관의 문제였다. 시민회관의 예에서 보았듯이 클래식음악 같은 부류만으로 그 공연장은 채워지지 않으며, 대중예술계는 시민회관이 사라져 대형 공연장이 없었던 게 현실이었지만 권위적 금기는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예외의 경우가 있긴 했다. 1985년 10월19일에 <문화방송>(MBC)이 주관하는 ‘대중문화예술인의 밤’이란 행사가 열렸는데 영화배우와 대중가요인, 코미디언까지 출연하는 대형 쇼였다. 세종문화회관 개관 이래 이런 예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주최자가 문화공보부(!)였다. 정부가 지시한 행사를 <문화방송>이 받아서 한 모양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소문으로는 그해 9월에 있었던 남북공연단 교류에 대한 일종의 포상이었다는 설이 파다했다. 1985년 9월 분단 이래 최초로 남북 예술공연단 교환공연이 이루어졌다. 남과 북 모두 정부가 허락한 인사와 보도진만 상대편의 공연을 구경할 수 있었고, 서울과 평양에서 모두 상대편 공연에 대해 엄청난 비난을 쏟아냈다. 그런데 뒷얘기로는 평양의 관객들이 남쪽 가수들이 ‘눈물 젖은 두만강’과 ‘불효자는 웁니다’를 부를 때에 유일하게 경직되었던 얼굴이 풀어지며 감동스러운 표정을 보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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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대중예술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던 세종문화회관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패티김은 물론이려니와 이미자 등 트로트 가수들에게도 무대에 설 기회를 줬다. <한겨레> 자료사진

 

평양 관객이 바꾼 트로트 편견

 

이들 트로트 가요는 북한에서는 오랫동안 금지된 상태였고, 이 공연에 대한 공식적 평가에서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친일사상을 불어넣기 위해 유포한 퇴폐적 류행가’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60대 이상의 관객이라면 자신들이 젊은 시절 즐겼던 추억의 노래를 40~50년 만에 듣는 경험이었으니 어찌 반갑지 않았으랴. 공연 참가자들은 이 대목에서 북한 관객의 마음이 움직였음을 그 자리에서 느꼈을 것이다.(※북한은 2001년 ‘타향살이’ 등 일제강점기와 남한의 대중가요 20곡을 해금했다. 심지어 ‘눈물 젖은 두만강’은 2002년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에서 민족의 노래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이런 변화에 1985년의 공연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북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작품은 가곡 ‘그리운 금강산’도 무용 <승무>도 아닌 트로트 가요였으니, 대중예술인에게 포상의 의미로 한 번 세종문화회관을 개방한 것이라는 게 이 시기에 나돌던 소문이었다. 트로트 가요를 ‘전통가요’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명명하고(일본 엔카의 영향으로 형성된 트로트가 전통가요라면 도대체 민요나 신민요는 뭐란 말인가!)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트로트 가요 순위를 별도로 매기는 등 방송사가 나서서 트로트 부흥 붐을 일으킨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이런 개방도 딱 한 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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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사는 대중·서민이 자신의 모습을 선명히 드러내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세종문화회관은 한국 대중가요를 트로트까지 받아들였다. 그리고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이른바 진보적 예술문화운동계의 작품에까지 문호를 개방했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두 가지 금기가 순차적으로 풀린 것이다.

 

대중예술의 세종문화회관 입성은 1989년 가을부터였다. 첫 시작은 서울시향의 공연에 잠깐씩 협연자로 불려나왔던 패티김이었는데, 이번에는 클래식음악의 들러리가 아닌 본격적인 대중가요 공연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이에 항의하여 자문위원 김성태와 박용구가 사퇴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트로트계의 여왕인 이미자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일본색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여 있던 ‘동백 아가씨’, 패티김의 스탠더드팝에 비해 ‘고급스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는 트로트가 드디어 세종문화회관 문턱을 넘었다. 이후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남진과 심수봉 등 트로트 가수들의 무대를 종종 만날 수 있게 됐다.

 

후자는 1994년에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 소속 단체들의 공연이 4회나 이루어진 것으로 대표된다.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을 기념하여 신동엽의 서사시를 원작 삼아 만든 가극 <금강>(문호근 연출)은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또 1989년 겨울부터 해마다 ‘노래판굿 꽃다지’라는 이름으로 공연되어왔던 총체적 대형 공연물 <모여드세>(’94 노래판굿 꽃다지, 박인배 연출)는 민주노총 건설이라는 기치를 내건 공연이었으니 공연장으로서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진보적 예술운동 진영의 공연은 1987년 이애주의 춤 공연 <바람맞이>부터 회당 수천에서 수만명의 관객을 대상으로 초대형 공연이 한 해에도 여러 번 이루어져왔다. 1989년 연말에 시작한 노래판굿 <꽃다지>와 1990년 3월부터 해마다 이루어진 <자, 우리 손을 잡자> 시리즈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흐름이 세종문화회관으로 들어온 것이다. 노천극장의 수만 관중을 쥐락펴락하던 ‘민주대머리’ 박철민(지금은 ‘감초 조연’으로 알려진 배우)이 역시 세종문화회관에서도 힘을 발휘했고, 소프라노 정은숙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렀다. 피아노 이중주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연주되었고, 푸른 작업복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춤을 추고 연기를 했다.

 

‘문화복지’ 개념 세운 박인배

 

이로부터 20년째 되던 2013년에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예총에 이르기까지 핵심 활동가였던 노동연극 작가·연출가 박인배가 세종문화회관 사장에 취임해 시민 중심의 문화공간으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데에 이르렀다. ‘이제 세종문화회관에서 마당극 봐야 하는 거야?’라는 비아냥거림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진보적 예술문화운동이 그저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는 작품을 하는 것이라는 편협한 통념을 넘어서서, 일반 시민이 스스로 작품을 고르고 평가하고 창작에까지 참여하는 활동을 함으로써 예술문화의 주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예술관의 변화가 핵심이었음을 정책으로 드러냈다. 뒤이어 예술의전당 공채 1기에 노동조합 사무국장 출신인 현 이승엽 사장 체제로 넘어오면서 ‘시민합창단’, ‘시민연극교실’, ‘생활예술오케스트라’ 등 이러한 시민참여의 공연과 교육은 이제 세종문화회관의 주요 사업으로 자리 잡았고, 낮 시간에 불 꺼진 공연장도 시민에게 개방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예술문화 정책의 기조는 예술문화를 그저 삶을 치장하는 액세서리로 취급하던 시대를 넘어 인간다움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핵심적 활동으로 보는 ‘문화복지’로 바뀌기 시작했으니, 이러한 시민 중심의 정책 변화 역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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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건설의 기치를 내걸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94 노래판굿 꽃다지 공연 포스터. 이영미 제공

 

유신시대의 권위를 한껏 드러내며 ‘고급한 공연’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다던 세종문화회관이 불과 10여년 만에 대중에게 친숙한 대중가요와, 시위대가 불렀던 민중가요까지 받아들이게 되고, 더 나아가 시민이야말로 예술의 주인임을 공연장의 핵심 정책으로 드러내는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설립 때는 물론 이후로도 오랫동안 정부 요인들이 들락거리는 행사의 단골 장소였던 세종문화회관의 로비는 ‘보안상’의 이유로 1990년대 말까지도 쉽사리 개방되지 않았다. 집회와 시위가 많아진 1980년대 말에는 시위대의 ‘집결지’로 애용되던 중앙계단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세종문화회관의 바깥인 광화문 광장만 시민들의 것이 아니라 공공극장 역시 시민들의 것임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한때 권위적으로 보이기만 했던 높다란 중앙계단은 이제 그저 누구나 편하게 앉아 쉬는 쉼터나 모임 장소, 온갖 피켓으로 바글거리는 집회 장소가 되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18540.html#csidx03a81cc88fac7679850b7cb3a74bf29